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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대중음악의 미래는 있는가?

 1. 들어가며

지난 4월 9일부터 10일까지 서울의 한 대학 '강당'에서는 '음악회'가 개최되었다. 조동진, 정태춘, 서유석, 임창제 등 이제는 잊혀져 가는, 그렇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통기타 가수'들이 후배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음악회의 이름은 '99 포크 페스티벌'이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아련한 이야기지만 1970년대 한국에서 '포크송'은 청년의 음악이었다. 최근의 무대와는 달리 조명은 현란하지 않았고, 화려한 댄싱도 없었고 가수들의 외모도 그다지 출중하지는 않았다. 통기타를 둘러맨 중년의 혹은 초로의 가수들이 오랜만에 청중과 만나서 '그때'를 되돌아보는 자리를 가졌다. 이곳에 모인 청중들은 '콘서트'를 찾는 젊은 청소년들과는 달리 인생의 정오를 지나보낸 중년들이었다.

비슷한 시간 신촌 홍대앞의 주말의 거리에서는 대학생 나이대의 청년들이 삼삼오오 떼지어 있다가 각각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머리를 울긋불긋하게 염색한 애들, 모자를 쓰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애들, 머리를 길게 기르고 검은 옷을 입은 애들의 목적지는 다르지만, 그곳은 모두 '라이브 클럽'들이다. 클럽 밖의 세상은 여느 때와 똑같지만, 클럽 안에서 이들은 특수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클럽에서 연주되는 음악은 '록 음악'으로 불렸지만 요즘은 '인디(indie) 음악'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쓴다.

이들이 라이브를 즐기는 동안 각 가정의 TV에서는 청소년을 위한 가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TV 스크린과 스피커에서는 늘 그랬던 것처럼 미소년 마소녀들의 화려한 춤과 노래가 흘러나왔다. TV 수상기는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가정의 '자녀들'에게 독점되었다. '댄스음악'이라고 통칭되는 이 음악은 가정 뿐만 아니라 카페, 나이트클럽, 거리(이른바 '길보드')까지도 점령했다.

세 장면은 '전통가요'를 제외한다면 현 단계 한국 대중음악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단면들을 하나씩 더듬어 보면서 글을 전개해 보자.

 2. 포크송 : 청년의 송가에서 성인의 만가로

대중음악에 관한 보편적 정의는 전문적 소양 없이도 즐길 수 있는 음악이자 전국의 익명의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음악이다. 즉, 대중음악은 '예술' 음악 art music이 아닐뿐더러 '포크' 음악 folk music이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포크는 대중음악의 한 장르다. 즉, 포크라는 용어는 외국어가 아니라 외래어이며, '전승되어 오는 공동체의 음악'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한국에서 포크송은 '전통 민요'와는 정반대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포크송은 '보통의 대중가요보다 오래 살아남아 애청된다'는 의미에서 '공동체의 음악'이라는 수식에 어울린다. 어떤 공동체인가?

이에 답하기 전에 포크 이전의 대중음악에 대해 조금은 알아보아야 할 듯하다. 한국의 대중음악의 '원형'은 일본 대중음악이 이식되어 형성된 트로트('전통가요?')이다. 32마디 형식, 일본식 5음계와 화성 진행, 특유의 리듬 패턴 (뽕-짜자-뽕-짝), 나아가 애상과 비탄이 가득찬 음색 등은 1950-60년대 미국 대중음악의 영향에 따른 변형에도 불구하고 잔존하고 있었다. 음악관계자들은 '뽕끼'라는 은어로 이런 특징을 지칭한다. 당시의 대중음악은 '음반사와 전속계약을 맺은 직업적 작곡가들이 만들고 그휘하에 있는 가수와 악사가 연주하는 3분짜리 곡'으로 정의될 수 있다.

반면 1970년대 등장한 포크송은 영미 대중음악으로부터 영향받으면서 일본색이 없는 새로운 음악을 통칭했다. 단적인 예는 최초의 포크송 레코드인 트윈 폴리오의 데뷔(이자 유일한) 음반 수록곡 대부분은 모두 영미의 팝 음악의 가사만 한국어로 바꾼 '번안곡'이었다. 당시 청년들이 즐겨보던 악보집들은 '포크송 모음' 등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는 점도 하나의 예이다. '국내'의 포크송과 '외국'의 팝송은 동일한 음악 어법에 기초하였고, 단지 가사가 한국어이면 포크송이었고, 영어이면 팝송이었다.

그런데 포크송은 외국으로부터 영향받은 음임에도 불구하고 '자생적인'것으로 간주되었다. 그 이유는 포크송이 청년문화(조금 정확히 말하면 대학문화)를 기반으로 했고, 상업적인 대중가요계와는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포크송 가수들은 '작곡가 선생님 휘하에 종속된 가수'가 아니라 '자작곡을 만드는 독립된 음악인'이었다. 즉, 기성의 직업적 대중음악계로부터 독립하여 개인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포크 이데올로기의 핵심이었다. 물론 포크송의 기수들 중에는 김민기, 한대수, 조동진처럼 상업적 대중가요계와 타협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지만, 송창식, 김세환, 어니언스처럼 매스 미디어를 통해 대중가요계의 스타가 된 경우도 많았다.

그렇지만 후자처럼 포크송이 상업적 대중가요의 일부가 된 것도 '결과적'인 것이었지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당시의 생각이었다. 이들 모두는 '통기타 코뮌'의 구성원이었다.

결론적으로 1970년대 한국 포크송은 개인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이 대중적 인기와 상업적 성공을 누릴 수 있다는 경험을 남겨주었다. 이들은 예술가이자 스타였고, 청소년의 아이돌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그렇지만 이 경험은 '미완'으로 그쳤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1975년의 대마초 파동 때문이었다.

대마초 파동 이후 대중음악계의 기성의 관습은 다소의 균열을 내고는 이내 봉합되었고 포크라는 용어는 점차 사라졌다. 1980년대 이후 주류 대중음악계에서는 '통기타 가요'라는 용어가 더많이 사용되었고, 대학가의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민중가요'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더욱 중요한 현상은 포크로부터 영향받은 음악들은 어떤 것이든 1990년대 이후 '성인 취향'이 되어갔고, 1980년대 후반 이후 대중음악의 메타장르가 된 '발라드'에 점차 흡수되었다는 점이다. 현 시점에서 '포크송 세대'에 속하지 않는 이들의 귀에 김종환과 안치환은 그리 달라 보이지 않으며, 더욱 젊은 세대들에게는 트로트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서두에 언급한 페스티벌을 포함하여 최근의 '포크 리바이벌' 현상이 IMF시대에 중년들을 위한 위민 행사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지만,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힘들다.

 

3. 록 음악의 어제와 오늘

1975년의 대마초 파동으로 타격을 입은 음악인은 포크송 가수들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신중현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었던 '록 음악'도 포함된다. 차이가 있었다면 포크송이 '불온'이라는 명목으로 단죄되었다면, 록 음악은 '퇴폐'라는 근거로 단죄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록 음악이라는 용어는 당시 대중의 용어가 아니었다. 일렉트릭 기타 중심의 사운드를 지칭하는 용어는 '그룹 사운드'였다. 억압에도 불구하고 그룹 사운드는 1970년대 후반의 시대의 대세였다. 밤무대라는 '생계형' 공간에서 발원한 그룹 사운드는 1970년대 후반에는 캠퍼스라는 '여가형' 공간으로 확장되었고, 마침내 '대학가요제'라는 주류 음악계로의 등용문도 확보했다.

그렇지만 그룹 사운드는 청년문화의 전위들에게는 '진지한' 음악으로는 고려되지 않았다. 생계형 그룹 사운드는 상업적이고 속물적인 대중음악의 하나의 변종 정도로 치부되었고, 캠퍼스 그룹 사운드는 외국 문화를 추종하는 자기도취적 제스처 정도로 간주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래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하이스쿨 밴드들도 '철부지의 반항심리의 표현'으로 치부되었다. 포크송과 그룹사운드의 영향을 모두 흡수한 들국화(및 동아기획 소속의 몇몇 뮤지션들) 정도만이 이런 평가로부터 예외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1990년대 접어들면서 사정이 변했다. '록 음악'은 포크송의 전통과 그룹사운드의 전통 모두를 아우르면서 '상업적 주류에 대한 진지한 대안'의 키워드로 자리잡게 되었다. 신중현, 산울림, 들국화, 시나위로 이어지는 '한국 록의 계보'가 만들어졌다. 1990년대 초의 록 담론은 포크 계열의 강산에와 안치환이 록 음악을 수용하고, 댄스 그룹으로 출발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록 음악으로 전향하고, 솔로 가수로 성공을 거둔 신해철이 록 밴드 넥스트를 결성하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무언가 미진했고, 그 미진함은 실체가 없다는 사실에 무력함을 낳기도 했다.

이리저리 방황하던 말들이 초점을 고정한 곳은 1995년 경부터 홍대앞에 형성되기 시작한 작은 라이브 클럽들이었다. 이곳에서는 이제까지와는 상이한 음악이 연주되었고, 펑크 록, 얼터너티브 록, 모던 록 등의 이름으로 '새로운' 록 음악이 창조되고 있었다. 방송과 언론의 주목에 이어 이 흐름을 통칭하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 붙여진 이름이 '인디 록'이었다. 1996년 드럭이라는 클럽에서 최초로 음반을 발매한 일을 시작으로 몇 개의 독립 레이블(indie label)이 만들어졌고, 이와 더불어 불법으로 규정된 클럽 공연의 합법화를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곳 출신의 델리 스파이스과 크라잉 너트 등은 언더그라운드의 '컬트'가 되었다.

1997년 경 절정을 이루었던 '홍대앞 스토리'는 1990년대의 자정에 이르는 지금 시점에서는 다소 차분해진 듯하다. 이곳의 이야기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므로 성과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수많았던 말들에 비한다면 현실은 다소 미흡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아직도 일반 대중에게 록 음악은 '밴드 출신으로 잘생긴 남자 솔로 가수'이거나 '악기를 든 오빠들을 뒤에 거느린 예쁘장한 여자 보컬'을 떠올리게 한다. 도식화해서 말하면 전자는 1980년대의 헤비 메탈 언더그라운드의 후예이고, 후자는 1990년대의 인디 록과 간접적으로 연관된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런 구분은 불필요하다.

어느 경우든 성공을 거둔 이들의 공통점은 음악 못지 않게 외모와 인성(personality)이 돋보였다는 점이다. 즉, 성공하기 위해서는 뮤지션쉽(musicianship)이 아니라 스타쉽(starship)이 더 중요하고,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노래 잘하는' 싱어(singer)이기 이전에 '말 잘하는' 채터(chatter)가 되어야 한다. 이런 변화는 1990년대 이전부터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4. 신세대를 위한 아이돌

앞서 1970년대 포크송 가수들은 청년문화의 상징(icon)이자 십대의 아이돌이었다고 언급했다. 반면 1980년대의 수퍼 아이돌인 조용필은 음악적 리더이긴 했지만 청년문화의 상징은 아니었고, 이 점에서는 1990년대 초 서태지와 아이들의 지위도 유사하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서태지 효과'가 감소하면서 '아이돌을 위한 아이돌'이 탄생한다.

음악산업의 구조가 이렇게 정착되는 과정은 1980년대 후반으로 소급될 수 있다. 때마침 다국적 직배사가 국내 음반시장으로 진출하면서 국내 시장에 대한 위기감이 발생하던 때다. 변화를 선도한 측은 방송사였고, 타겟은 십대 중고생에 맞추어졌다. 이와 동시에 라디오에서 음악이 나오는 시간보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청취자 사연, 스타 초대, 전화 리퀘스트, 전화 데이트, 꽁트, 칼럼, 백일장 등의 '특별 코너'들이 마련되었고, 음악전문 DJ들도 브라운관의 스타들로 대체되었다. '라디오 방송의 토크쇼化' 혹은 'FM의 AM화'를 통해 지상파 방송은 '수다를 통해 스타와 팬 사이를 친숙하고 일상적으로 만들어주는' 공간으로 정착했다.

물론 스타에게 주기적으로 음악을 공급해 줄 제도가 필요했는데, 이는 '기획사'라는 제도로 정착했다. 한국에서 기획사는 음악을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들의 '토탈 매니지먼트'를 담당한다. 기획사는 1980년대 후반부터 로열티(판권료 및 저작권료) '개념'이 발생하고 '방송을 통한 홍보'가 중요해지면서 등장한 '매니저'라는 인물이 제도화된 것이다. 이들은 스타 관리의 일환으로 작곡자에게 '곡비(曲費)'를 지불하고 음악을 구매한다. 그 점에서 현재의 대중음악의 비즈니스는 포크 이전의 대중음악의 비즈니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음반사가 기획사로 바뀌고 작곡자의 면면이 달라졌을 뿐이다. 물론 음악 스타일도 달라졌다. '기획사의 주문으로 작곡가가 공급하고 아이돌이 부르는 음악'은 댄스음악이라는 단어로 통칭된다('발라드'라고 해서 방식이 크게 다르지는 않다). 댄스음악의 비즈니스는 뮤지션과 청중 혹은 스타와 팬이 호환적(互換的)이라는 전제 하에서 출발한다. 달리 말해 누구나 재능과 무관하게 잠재적 스타가 될 수 있다. 스타 지망생 중에서 '노래가 조금 되면' 가수가 될 수 있고, 가수가 된 뒤에는 TV의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스타의 이미지를 확산한다. 심하게 말하면 아이돌은 우상이라는 본래적 뜻보다는 기획사들이 비즈니스를 성공적으로 이행하기 위한 꼭두각시에 가깝다.

여기서 댄스음악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 H.O.T.도 S.E.S.도 아니고 이수만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포크송의 파장이 쇠퇴하던 시절 통기타 가수의 후발주자로 등장하여 몇 개의 히트곡을 남겼고 한때는 그룹 사운드도 결성했다. 그는 뮤지션으로서의 경험으로부터는 청소년의 정서를 착취하는 방법을 배우고, MC와 DJ 등 방송인의 경험으로부터는 상업적으로 '뜨는' 방법을 체득한 듯하다. 그가 작곡가와 계약을 체결한 방식은 과거에 음반사가 작곡가들과 전속계약을 맺는 방식과 유사하고, 스타를 관리하는 방식은 과거에 작곡가가 가수를 다루는 방식과 유사하다. 물론 그는 과거보다 세련되고 영리한 인물이라서 스타를 '캐릭터'로 판매하는 전략도 가지고 있고, '보통의' 기획사와는 달리 '좋은 음악'이 있어야 한다는 철학도 가지고 있다.

댄스음악의 음악적 특징은 무엇보다도 창법에서 드러난다. 목소리는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서 나오는데, 이런 창법은 코맹맹이 소리가 나고 톤도 빈약하지만 '가창력 없는 가수'가 음표를 발음하기는 쉽다. 그 결과 기획사에서 시작된 댄스음악의 순환은 방송국을 거쳐 노래방에서 완결되는 회로가 완성된다. 가수가 립 씽크를 하는 동안 자막으로 가사가 나오는 TV 순위 프로그램은 마치 '직업 가수를 위한 노래방'같다.

최근 들어 댄스음악에도 변화가 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댄스음악은 랩(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레게(김건모, 룰라), 하우스(노이즈), 레이브(Ref), 정글(박미경) 등 새로운 장르의 이름을 들고 나왔다. 지만 1997년 경부터는 더 이상 새로운 장르가 수입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일부는 트로트를 비롯한 포크 이전의 대중음악의 전통으로부터 차용을 시작했다. 댄스음악의 멜로디는 의외로 처음부터 '전통적'이었다. 거기에 트로트, 맘보, 차차차, 스윙 등의 '고전적' 댄스 리듬, 그리고 '사랑과 이별'이라는 보편적 감정을 다룬 가사와 더불어 신세대가요에는 '뽕끼'가 더욱 많아졌고, 이제는 세대화합의 기능도 원만히 수행하고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은 이로써 하나의 순환을 완료해 보인다. 청년문화의 아이콘은 사라지고 대중문화의 우상만이 남았다. 우상들 중 나이든 이들은 때로 국민가수라는 이상한 명칭으로 등장한다.

 

5. 맺으며 :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국적(nationality)을 위하여

'한국 대중음악'은 하나의 순환을 마무리하면서 외국의 영향을 토착화하는데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보통의 대중음악의 팬들은 외국의 트렌드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고 국내 가요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그자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중음악이 산업적으로, 문화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호조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문제점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국내 음악이 충분히 '한국적'인가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동안 주류 대중음악의 스타일은 외국의 스타일을 차용하여 국내의 정서에 알맞게 가공한 것들이다. 그동안 개방되지 않았던 일본 음악으로부터의 차용은 때로 '노골적'이었다. 따라서 일국의 범위를 벗어나 사고해 본다면 한국의 대중음악의 '수준'이 드러난다. 현재 한국의 주류 대중음악인들은 세계 각국에 대해 문화적 영향력을 미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음악들을 뿌리까지 천착하면서 추구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4,000억원 규모의 국내시장의 폐쇄회로 속에서 생산되고 소비될 뿐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한국성'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것일 뿐이다.

그 결과 주류 음악의 획일성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들이 외국의 트렌드에 민감한 사람들에 의해 나오는 현상은 역설적이자 자연스러운 일이이다. 앞서 잠시 언급한 인디 레이블 운동의 아이러니는 외국의 음악적 경향에 '종속'된 채로 주류 음악계로부터 '독립'을 시도한다는 데 있다. 인디 음악들 중 음악성이 뛰어난 경우에도 독창성(originality)을 충실히 구현한 경우가 드물다는 사실이 이러한 아이러니의 표현이다. 아무리 혁신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미 확립된 트렌드를 수용하는 것의 한계는 명확해 보인다.

굳이 '일본문화개방'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문화적 세계화 과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세계화가 경제적 합리화 과정을 통해 각국의 문화를 동질화시키고 국내 문화산업을 도태시킬 것이라는 '걱정'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따라서 우리 것을 육성해야 한다'는 발상은 너무도 유치한 생각이다. 세계화 과정의 이면에서는 이질적 문화들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다수의 혼종(hybrid)들이 탄생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른바 '국적불명'의 사운드가 도처에 존재하고, 이것이 한국의 대중음악이 처해 있는 조건이다. 문제는 국적불명이라는 말을 '외국 것을 적당히 수용하여 가공하는 것'을 거부하고 나아가 '외국 것을 무분별하게 숭배하는 것'을 넘어서는 길을 찾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세계화 시대의 문화적 빈곤국으로 남는 길이 있다. 하긴 문화적 빈곤 속에서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20세기 한국'이 밟아왔던 길이다.

1999.4.14
{이상건축}에 수록.
1999 신현준 (gilles@now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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