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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하리:
1980년대 문화적 정세와 민중문화운동

 1. 들어가며: 문화가 부재했던 시기에 대한 어떤 회고

1981년 5월 여의도 광장에서는 {국풍 81}이라는 '관제 행사'가 개최되었다. 대학교에 입학한 지 두 달 정도 되던 시기였고, 난생 처음 맡아본 최루탄 냄새에 익숙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나는 동기들과 어울려 교내에서의 '데모'를 끝내고 삼삼오오 여의도 광장으로 모였다. 행사에 참여하여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마치 계란으로 바위치는 심정으로 '학우'들은 행사장 구석구석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시도했다. 그때 무대 위에서 전기 기타를 둘러맨 신중현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몇 년 전 TV 프로그램인 <<금주의 인기가요>>에 나와서 와와 페달을 밟으며 <미인>을 연주하면서 노래부르던 그는 경이로운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 연주한 <아름다운 강산>은 마치 '관제 건전가요'처럼 들려 왔고, 그의 옆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여자들은 퇴폐적으로만 보였다. 한동안 잊혀졌던 인물이 우여곡절 끝에 컴백한 모습을 보는 곳이 하필이면 이런 곳이라니....1)

그해 10월에는 학교에서는 '마지막 관제 축제'가 있었다. 마지막 날 대운동장에서는 '그룹 사운드 초청 공연'이 있었다. 무대에 등장한 그룹은 건국대학교 그룹 사운드 옥슨 81(Oxen 81)이었다. 순간 1년 전 고3의 수험 생활의 지루함을 잊기 위해 장충 체육관에서 열린 <젊은이의 가요제>를 찾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금상을 차지한 그룹은 현재 '종합예술인'으로 활동하는 홍서범이 이끌던 옥슨 80(Oxen 80)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대운동장 위에 있는 그룹은 옥슨 80의 한 기(期) 후배인 셈이다. 1년 전 '불놀이야...'라는 후렴구를 박수를 치며 따라불렀던 나의 손에는 돌맹이가 쥐어져 있고, 옆에 있는 보다 과격한 인상의 학우는 각목을 들고 있었다. '외래 퇴폐문화의 배격'이 당시 대학생들의 지배적 정서였고 그룹 사운드는 외래 문화의 표상이었다. 결국 공연은 취소되고 말았고, 다음 날 신문에서는 '서울대학교 축제에서 폭력 사태, 과격 운동권 학생들 각목 휘둘러' 운운하는 기사가 실렸던 기억이 난다.

1981년에 겪은 두 개의 '체험담'은 1980년대와 문화가 맺는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대중문화는 상업적이고 퇴폐적이고 족보없는 외래 문화에 지나지 않았다. 굳이 대학생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1980년대 한국 사회를 '치열하게' 살아가려고 한(모두가 '실제' 치열하게 살았는가는 다른 문제다) 사람들에게 문화는 중요한 주제가 아니었다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떤 정치적 입장을 선택했다고 해도 문화는 '정치'나 '경제'에 비해 우선순위 면에서 밀려나 있었다. 그 이유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지배세력이든 저항세력이든 중도세력이든 1980년대의 '절박한' 상황은 '여유로워' 보이는 문화라는 단어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1980년대에도 문화는 분명히 존재했다. 오히려 문화는 당시에 인식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가변적인 형세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복잡하고 가변적인' 양상에 접근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화에 대한 일반론을 검토하는 일은 번거로워 보인다. 나는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하여 1980년대의 문화적 형세를 다루고자 한다. 하나는 문화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문화운동이고, 마지막은 대중문화다. 도식적으로 분류한다면, 정부의 영역, 운동의 영역, 일상의 영역이다.

 2. 1980년대의 문화정책: 19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

1)1970년대의 '문예 중흥'으로부터...

1980년대의 문화정책을 살펴보기에 앞서 그 모태가 된 1970년대의 문화정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1980년대가 여러 면에서 여전히 1970년대의 연장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또한 이런 '연장'을 잘 보여주는 주체는 '정부'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는 이른바 '문예중흥 5개년 계획'이 실시된 시기였다. 1972년 8월 문예진흥법의 제정.공표, 이듬해 문예진흥원의 발족을 필두로 시작된 '문예중흥'은 '경제개발'에 이은 박정희 정권의 '계획'의 하나로 설정된 목표였다.2) 이 정책의 목표는 대략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이는 1) 올바른 민족사관 정립 및 새로운 민족예술 창조, 2) 예술의 생활화.대중화를 통한 국민의 문화수준 향상, 3) 문화예술의 국제교류의 적극화를 통한 문화한국의 국위선양으로 요약될 수 있다. 또한 이런 목표 하에서 구체적 사업 내역으로는 1) 문화기반 조성, 2) 민족사관 정립, 3) 예술진흥, 4) 대중문화 창달이 설정되었다.

현 시점에서 1970년대 시행된 문예중흥정책의 특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된 평가가 있다. 무엇보다도 앞에 소개한 내용에서 보듯 정책의 목표가 매우 포괄적이라는 점이다. 문화의 민족화, 생활화.대중화, 국제화라는 세가지 목표는 '모든' 목표라고 할 수 있으며,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이들 목표들 사이에 별다른 우선순위나 시기별 중점사항의 변화를 관찰할 수 없다. 이로 보건대 1970년대의 문예중흥정책은 문화나 예술의 진흥을 궁극적으로 '국가발전'과 '국위선양'이라는 목표에 수렴시키려는 발상이었다. 물질적 삶(이른바 '경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삶(이른바 '문화')까지도 '위로부터' 의도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발상은 지극히 '박정희주의적'이었다. 실제로 1977년의 한 관변 문건에 의하면 문예진흥정책은 "포괄적인 경제개발전략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문화의 자율성이라든가 문화의 내재적 가치라는 인식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이런 목표들의 타당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는 확인된 바 없고, 여러 채널을 통한 공식적 토론 등의 민주적 절차를 밟지도 않았다. 정부 주도 하에서 몇몇 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여기서 토의된 사항이 당시 '주권적 수임기관'인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일사천리로 가결되고, 각종 공공기관으로 공보와 교육 등의 형식을 통해 하달되는 방식을 취했다. 따라서 '유신 이념의 홍보와 계몽'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국가발전에 부합한다'고 규정된 문예활동에 대해서는 각종 지원이 이루어진 반면, '국가발전에 저해된다'고 규정된 문예활동은 배제의 대상으로 설정되었다.

그럼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원과 배제가 이루어졌는지를 살펴 보자. 먼저 지원의 경우 앞서 본 4가지 사업분류의 세목과 투자 내역에 대해서 아래 표를 참고해 볼 수 있다. 1979년 문화공보부에서 발행한 자료인 {문화공보 30년}에서 발췌된 이 표에 의하면 문예진흥계획 기간과 거의 일치하는 1974년부터 1978년 사이의 5년 간 총 485억 원의 자금이 투입되었고, 이 중에서 무려 63%에 해당하는 306억 원이 민족사관 정립에 해당하는 '문화재'에 투여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문화재 사업이 발굴 및 보전 등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속성으로 인한 점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많은 비용의 투입이라는 인상은 지울 수 없다. 아무튼 문화재 관리를 포함한 민족사관 정립이라는 목표에는 비교적 후했던 반면, 예술진흥이나 대중문화 창달에 대한 지원은 상대적으로 소홀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영화에 대한 지원은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이른바 '우수영화제작 선정'이라는 제도를 통해 충분한 검열을 거쳐 여과시킨 뒤에 이루어진 지원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예진흥에 대한 지원 방법은 보조금 지급을 통한 직접 지원과 시상제도를 통한 간접지원 두 가지가 대표적이다. 전자의 경우 문예진흥원을 통해 조성된 기금을 지원신청을 받아 심의를 거친 후 지원의 규모를 결정하는 제도가 정착되었다. 다른 한편 시상제도는 '대한민국'이라는 글자가 앞에 붙은 세 제도 즉, 대한민국 연극제, 대한민국 음악제, 대한민국 미술제가 탄생한 것도 1970년대부터다.

여기서 지원의 대상이 전통문화계나 고급문화계에 국한되었다는 사실은 새삼스럽긴 하지만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해 한국에서도 '예술 대(對) 대중문화'라는 서구적 분류법이 유지되었고, 따라서 대중문화계는 '시장 원리'에 따라 움직였고 별다른 정부 개입은 없었다. 조금 과장을 더한다면 전통문화계나 고급문화계가 지원의 대상이었던 반면, 대중문화계는 배제의 대상이었다. 표에서 보듯 1990년대 이후 문화산업정책의 대상으로 부상하는 대중음악, 만화 등은 아예 항목조차 분류되지 않고 있다. 1970년대 당시에도 범국민적 영향력을 가졌던 문화 형식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지원이 부재했다는 사실은 의외라면 의외다.

따라서 이때 '배제'는 지원의 부재라는 소극적 방식이 아니라 물리적 금지라는 적극적 방식까지 동원하는 것을 불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원 부재와 물리적 금지 사이에 사전 검열이라는 보다 미시적 개입이 놓여 있엇다. 1970년대 금지의 대상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대중음악과 출판이었다. 배제에 동원된 두 가지 수사는 '퇴폐'와 '불온'이었는데, 한 예로 음악인들을 대규모로 검거한 1975년의 이른바 '대마초 파동'은 퇴폐문화를 먼저 격리시키고 뒤이어 불온문화를 처단하는 수순을 밟았다. 또한 퇴폐 출판물(예를 들어 선정적 주간지)에 대한 단속과 불온출판물(예를 들어 이론.사상서적)에 대한 판매금지 조치 등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루어진 '정책'들이다.

총괄적 평가를 위해서는 이런 선별적 지원과 배제가 정책이 의도한 목표를 낳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할 듯하다. 앞서 보았듯 박정희 정권이 '정말' 민족문화의 창달, 고급예술의 진흥, 대중문화의 육성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단지, 당시의 지배층들의 출신 성분이나 직업적 특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당시의 지배층의 핵심은 농촌에서 성장하여 직업 장교로 근무한 뒤 정치에 투신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고급예술에 대한 심미안을 기를 충분한 기회를 갖지 못했으며, 성장기와 청년기에 대중문화를 경험하지도 못했다. 하다못해 1980년대 이후 고급장교들에게 보편화되는 '미국 유학'의 경력도 밟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고급예술에 대한 친화성은 잠재적이었던 반면, '외래' 문화에 대한 거부감은 본능적이었다. 이런 성향이 지극히 우경화된 목표를 설정하고 타율적 방법을 동원했다는 점이 이제까지 1970년대의 문화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여기에 이들의 분류법에 따라 몇 개의 논점을 추가해야 할 듯하다.

첫째로 지적할 점은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의도가 경제성장에 따르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급속한 진행 앞에서 비현실적이었다는 점이다. 즉,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진행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도시적 감성의 대중문화는 전통 농경사회의 감성에 기초한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1970년대 말에 이르러 인구의 50%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소득의 70%가 도시에서 생산되는 상황에서 '전통' 문화는 국민의 일상 생활과는 동떨어졌고, 점차 관제화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 보편적 가치를 지닌다고 간주된 고급예술은 향유층을 발견해내지 못했는데, 이는 한국의 신흥 자본가들이 '천민적'이라서 경제적 부에만 집착했을 뿐 문화적 부에는 아직 눈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들어 '재벌가의 여인들'이 예술품에 대해 다분히 투기적인 관심을 갖기 전까지는 고급예술이 중흥되기 위한 시스템은 갖추어지지 못했다. 결국 고급예술은 소수의 엘리트들만이 특권적으로 향유하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대중문화는 앞서 언급한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재능있는 문화예술인들 대부분이 활동 금지조치를 당함으로써 자생력의 싹이 짓밟혔다. 요행히 살아남은 문화예술인들도 시장의 강제 하에서 생계를 위해서만 활동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대중문화는 여가용 연예오락 수준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2) ....1980년대의 '새 문화정책'을 거쳐

1980년 출범한 제 5공화국 정부(이하 '5공 정부'로 약함)의 문화정책의 출발을 논할 때 대표적 사건으로 거론되는 것은 1980년 11월의 {언론기본법} 제정에 이은 '언론(및 방송) 통폐합', 그리고 앞서 언급한 1981년의 {국풍 81}이다. 물론 두 개의 사건의 성격은 그 사이 기간의 간격이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상반된 것이다. 언론 통폐합이 '대학살'이라고 표현된다면, {국풍 81}은 어쨌든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그렇지만 상반된 성격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전자가 매스 미디어 기관에 대한 정부의 통제를 (재)확립한 시도였다면, 후자는 이를 토대로 하여 정부가 생각하는 국가발전의 목표에 부합하는 문화를 이식하려는 시도였다.

이 모든 것이 정통성 부족으로 시달릴 수밖에 없었던 5공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굴절된 것이라고 단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굴절을 포장하기 위한 수사에서 어떤 징후를 발견할 필요는 있다. 이를 위해 먼저 5공 정부에 의해 개정된 헌법에서 문화와 관련된 자구를 훑어보는 일로 시작해 보자.

1980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 개정된 제 5공화국 헌법은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제 8조)라고 적혀 있으며, 이를 대통령의 취임선서에까지 다짐하도록 규정했다(제 44조). 또한 '교육혁신과 문화창달'은 1980년대 4대 국정지표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런 '전통문화의 계승'과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목표는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확립된 것과 크게 다른 것이 아니다. 당시의 정권은 1980년대의 문화정책을 '새문화정책'이라고 불렀지만 새로운 정책은 목표와 집행 양면에서 1970년대의 연장이었다. 정책의 목표 면에서는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기치 아래 각종 관변인물에 대한 지원과 관변행사의 주최가 계속되었다.3) 집행 면에서는 관 주도의 각종 행사와 각종 '윤리위원회'의 검열이 지속되었다. 윤리위원회는 방송, 신문, 도서잡지, 공연 등 4개의 전담분야로 나뉘어 '검열을 통한 배제'에 앞장섰고, 줄이은 '필화 사건'에서 보듯 때로는 공권력을 통한 적극적 금지도 삼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1980년대 속에서 1970년대가 지속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1980년대의 문화정책은 1970년대와 몇 가지 점에서 '새로운' 면을 보인다. 편의상 문화정책의 대상과 방향을 나누어 검토하면서 차이를 지적해 보자. 먼저 문화정책의 대상을 검토해 보자. 1970년대의 문화정책이 주로 전문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1980년대는 정책의 대상을 전문 문화예술인으로부터 국민 전체로 확대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대중문화가 퇴폐화, 낭비화되었고 세대간, 지역간 문화갈등이 심화되었다"는 나름의 현실 인식에 기초한 것이었다. 여기에 기초하여 '국민정신개혁운동'이라는 이름의 '정화운동'이 전개되었고, 국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대중문화의 형식에 대한 관심이 기울여졌다.4) 즉, 정책의 외연이 이전 시기보다 확대된 것이다.

둘째로 정책 대상의 변화는 정책 방향의 변화를 수반했다. 그것은 퇴폐적, 향락적, 외래적이라고 간주된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가 '육성'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완화'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대중문화를 억압 일변도로 다스릴 수는 없다는 현실 인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컬러 TV의 조기방영, 프로 스포츠의 확대, 영화검열(및 극장 설립규정)의 완화 등의 현안들은 모두 범국민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는 또한 좁은 의미에서는 문화에 포함되지 않지만 국민의 일상적 생활양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조치들을 낳았다. 몇 가지 예만 들어보아도 통행금지 해제, 중고생 교복 자율화, 대학로의 개장같은 현상들은 1980년대 대중의 삶이 1970년대와 크게 달라지는 영향을 미쳤다.

한마디로 1980년대의 문화정책은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삼았으며, 그 방향은 대체로 '규제완화'의 방향을 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규제완화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완화가 선별적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한 예로 영화검열 완화의 경우 주로 '저급한' 영화만을 선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다. 즉, '불온한' 문화의 금지는 여전했고 1981-1983년 사이에는 이전보다 더욱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온한' 반대자들이 '3S 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이라고 불렀던 표현은 당시 정책의 새로운 기조를 말해준다. 1970년대의 문화정책이 원칙적으로 외래 퇴폐문화를 금지하면서 실제로는 '모든' 문화에 대한 규제를 단행했던 반면, 1980년대는 '퇴폐문화'에 대한 선별적 해금을 실시하면서 이런 조치가 체제와 그리 불편하지 않게 어울리도록 관리하는 양상을 취했다. 즉, 정책담당자가 보기에 '퇴폐적'이지만 별달리 '위협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는 방치한다는 것이 당시의 문화정책의 이데올로기로 보인다. 1970년대와 비교한다면 정책의 지배적 원리가 금지의 논리에서 방치의 논리로 전화한 것이다.

따라서 정책의 성과가 그다지 '문화적'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단적인 예로 앞서 언급한 {국풍 81}의 경우 탈춤과 그룹사운드 공연이 한 자리에서 치러지고, 민속놀이 줄다리기와 스케이트보드가 같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행사의 내용이 '다양했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형식의 다양성 사이에 어떤 일관성을 형성하려는 노력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국풍 81}을 비롯한 관제행사들은 새로운 문화적 '모델'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를 통해 '문화의 탈정치화를 통한 정치적 이용'이라는 1980년대 문화정책의 기조가 형성되었다는 '성과'를 빼면 말이다.

문화의 탈정치화를 통한 정치적 이용을 보여주는 사례는 국내 행사 뿐만 아니라 {미스 유니버스 대회}나 {서울가요제}같은 국제행사로도 이어졌다. 그 절정은 물론 1986년의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년와 서울 올림픽의 개막 및 폐막 행사였다. 1970년대가 문화를 주로 '교육'과 연관지었다면 1980년대는 문화를 주로 '체육'과 연관지었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그렇게 본다면 1993년 문화체육부가 탄생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위 두 가지 '국가적 대행사'의 개막과 폐막 행사는 {국풍 81}처럼 졸속은 아니었지만 일상문화와 괴리된 관제문화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많은 초중고 학생들이 수업을 미루고 '동원'되어 '훈련'을 거듭하여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이는 전국체전이나 소년체전같이 오래 전부터 시행된 체육행사를 치르는 것을 확대된 규모로 재생산한 것이었다.

그런데 1986년의 아시안 게임과 1988년의 올림픽 사이에는 정권교체 및 헌법개정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새로이 제정된 제 6공화국 헌법은 정치체제나 권력구조같이 민감한 사안에서는 많은 변동이 있었지만 문화정책 의 기조 면에서는 크나큰 변화를 발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실무 면에서는 그렇지 않다. 당시의 변화를 추적하면 1980년대 후반 문화는 교육에서 체육을 거쳐 '산업'으로 자리를 바꾸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본다면 문화를 산업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대중문화가 제자리를 찾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가 실제로는 사후적 추인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마지막에서 알아 볼 것이므로 여기서는 하나의 에피소드만을 짚어보면서 일단락하자.

1988년 미국의 직배사에 의해 최초 배급된 외화가 상영된 극장에 뱀이 출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는 뒤에 국내의 중견 영화감독과 극장주가 '사주'한 것으로 밝혀졌고 뒤에는 법정 구속으로까지 이어졌다. 사건을 발생시킨 인물들이 특별히 반미(反美)를 주장한 인사들은 아니었지만, 당시 '시대의 감성'은 느낄 수 있다. 지배세력이 자신들의 정치.경제적 필요에 의해 외래 문화의 범람을 방치하더니 합리적 제도나 기준도 마련하지 않은 채 무원칙하게 방치한다는 인식 말이다.

 

3. 19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 1980년대 속의 1980년대

1) 민중문화운동(1) : 대학생의 하위문화

1980년대 한국의 지배 문화가 "사이비 고급문화, 상업적 대중문화, 관제 전통문화"5)일 뿐이라는 인식이 단지 '지식인의 불만'인지 '대중의 자각'인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불만을 품은 지식인이 은둔적 개인이 아니라 참여적 집단이었음은 선명하다. 위와 같은 인식에 기초하여 '진정한, 건강한, 민중적' 문화를 지향하는 의식적 운동이 나타난 것도 어느 정도는 자연스럽다. 이를 '민중문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통칭해 보자.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이 하나의 노선 하에서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문화운동 진영에 속하지 않는 문화적 흐름들은 '운동'으로부터 배제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뒤에 보듯 민중문화운동은 여기에 조직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여타의 문화적 '운동'(문자 그대로 '움직임'이라는 의미에서의 운동)을 배제하고 문화운동의 정통성을 독점했다는 의도하지 않은 폐해를 노정하기도 했다. 여기서 민중문화운동이란 1980년대 문화에서 반(反)고급, 반(反)상업, 반(反)관제라는 지향의 대명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민중문화운동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기는 쉽지 않지만, 시간의 궤적을 훑어보면서 문화정치적 지향의 변화를 추적하는 일은 가능할 듯하다. 19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은 1970년대(혹은 그 이전 시기)부터 대학가의 개별 '써클' 중심의 활동이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변형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단 편리해 보인다. 즉, '민중'문화운동은 '진짜 민중'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기 보다는 대학교의 하위문화(subculture)에 기원을 두고 있는 셈이다. 탈춤, 마당극, 풍물, 민요 등의 전통문화의 장르를 중심으로 형성된 써클들은 이미 오랜 연혁을 지닌 상태였고, 노래, 영화, 만화, 사진, 문학 등의 현대적 장르를 중심으로 모인 써클들도 몇몇 대학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 써클의 활동을 논하기 전에 1980년대 대학생들의 전반적인 문화적 정서에 대해 짚어보자. 1980년대가 이전 시기와 달랐던 점들은 1970년대까지의 자유주의적이고 낭만적이고 엘리트지향적이었던 대학문화의 분위기가 사회주의적이고 현실적이고 민중지향적으로 급격히 변화했다는 점일 것이다. 이런 변화는 1980년의 광주 민주화 운동을 비롯한 '당시의 삼엄했던 정치적 상황의 효과'로 설명될 수 있지만, 다른 이유들을 추적해 볼 필요도 있다.

하나는 1970년대 후반까지 그럭저럭 대학문화의 효소로 간주되었던 대중문화의 형식들이 '대학가요제'나 '개그맨 선발대회' 등을 통해 주류 연예계로 완전히 흡수되어 버린 현실이다. 달리 말해 1980년대 초 대학의 문화적 정세의 한 측면은 소(小)세대(mini-generation) 간의 정체성을 둘러싼 게임이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의 대학생들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한다'고 생각한 선배들과의 차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정권 측에서 제공한 것이다. 제 5공화국 정권은 이른바 '졸업정원제'를 실시하면서 대학별 본고사를 폐지하고 대학교 입학정원을 평균 두 배 이상으로 대폭 증가시켰다. 이는 1975년에 단행된 박정희 정권의 고교 평준화 정책에 이어 또한번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교육제도의 변화로 인해 대학교육은 '대중화'되었고 대학생의 정체성을 전반적으로 '평준화'시켰다. 그 결과 대학생의 엘리트 의식은 희석되었다. 6)

그렇지만 1980년부터 1983년에 이르는 기간 문화 써클의 위상은 아직 모호했다. 일부 학교에서 문화 써클은 스스로를 '딴따라 써클'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자조와 자부가 뒤섞인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각 대학의 써클들은 자연발생적인 '취향의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정기 공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정도였다. 몇몇 개별 써클의 공연(특히 마당극과 탈춤)이 '과민반응'을 보인 공안당국에 의해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화 써클들은 문자 그대로 '국지적(local)'이었고, 그들 사이에는 느슨한 연대감만 있었을 뿐 명시적인 조직적 관련은 없었다.

여기서 이들 대학 문화써클들을 지칭하는 용어의 변화를 추적하는 일은 흥미롭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써클이라는 외래어는 점차 사라지고 동아리라는 '순우리말'이 일반적 통용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MT라는 외래어도 모꼬지라는 순우리말로 변화되었다. 동아리라는 말 이전에도 개별 써클을 지칭하기 위해 반(班)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 -- 예를 들어 연극반, 탈반 -- 도 알 것이다. 미묘한 것은 써클과 동아리 사이에 존재했던 '패'라는 용어다. 이 용어가 무리를 뜻하는 '순우리말'일 뿐만 아니라 패거리라는 단어의 뉘앙스에서 느껴지듯 서민적 용어임을 상기한다면, 이런 변화는 단순한 용어법의 변화 이상의 의미를 수반했다. 패라는 용어는 이들의 민족지향적이고 민중지향적인 지향을 드러내 주는데, 이는 어떤 선별과 배제의 메커니즘을 내장하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컴퓨터, 검도, 외국어 회화, 종교, 등산, 여행 등을 매개로 만들어진 곳은 '취미 써클'이었고, 탈, 노래, 풍물, 마당극, 사진 등을 매개로 만들어진 곳은 '문화패'였다. 정부의 교육 당국이나 대학 당국이나 전자는 '건전'하다고 보았고 후자는 '불온'하다고 보았다. 전자는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여가 시간을 활용하는 공간이었고, 후자는 전공 학업을 포기한 채 동아리 활동에 전념하는 학생들의 공간이었다.

이런 용어의 변화는 문화패들이 정치화될 뿐만 아니라 조직화되어가는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여러 문화패들 사이에서는 소속된 학교에 따라, 추구하는 문화 장르에 따라 적잖은 차이가 있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정치적이었던 학생운동의 전위집단과 '큰 뜻'을 공유하고 있었다. 즉, 문화패란 대학별로 시기별로 정도의 차이는 달랐지만 학생운동과 인적으로(부분적으로는 조직적으로) 연계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1980년대 초중반 문화패들은 당시 학생운동의 전위집단과는 다소의 거리가 있었다는 사실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즉 문화패의 성원들은 강직한 성품의 '지사형 투사'가 주류를 이루었던 학생운동가들과는 달리 어느 정도는 낭만적이고 보헤미안적이었다. 또한 그후의 시기와 비교한다면 조직적 관련도 그다지 긴밀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학생운동의 지도부는 문화패들의 정치적 성향이 모호하다고 생각했고, 문화패들은 학생운동의 지도부가 정치지상주의 = 문화포기주의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양자 사이에 직.간접적 논쟁을 낳기도 했지만 대체로 기능적 역할분담으로 귀결되었다. 그 계기는 1984년 합법적인 총학생회가 부활되고 그에 따라 학생운동의 공적 활동의 중요성이 증가하면서부터다. 정치 대중집회에서 문화 행사의 역할과 비중이 증대하면서 문화패는 정치적 선전·선동에 효율적인 집단으로 부상했다. 정치와 문화는 긴밀하게 융합되었고, 대자보, 걸개그림, 노래 테이프 등은 문화적 미디어임과 동시에 정치적 수단이었다.

이와 더불어 1980년대 중반 대학가의 문화운동에서 두 가지 변화된 양상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문화패의 공연 자체가 정치집회를 닮은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문화패 출신의 활동가들이 학생운동을 비롯한 직업적 운동에 조직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한 현실의 반증이다. 몇몇 문화패들은 학생운동의 전위가 지도하는 대중이 아니라 그자체가 전위 조직의 일부처럼 되었다. 다른 하나는 두 번째는 '민중성'의 내용이 '전통성'으로부터 '전투성'으로 이행했다는 점이다. 예술적 선전·선동의 효율성을 위하여 장르의 기능적 전문성이 강화되었고, 그 결과 탈춤과 마당극같은 전통적 형식이 쇠퇴한 반면, 음악(노래), 그림, 만화, 사진 같은 현대적 형식의 중요성이 증대하였다. 1987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2) 민중문화운동(2): 직업적 전문가의 실천

민중문화운동이 전기를 맞이한 것은 1987년부터지만 그 준비는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다. 1984-5년을 전후하여 대학 문화패 출신들이 대학가 외부에서 전개한 활동들은 이미 일정한 성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활동은 크게 둘로 대별할 수 있다. 하나는 전국적 구심 조직을 결성하여 전개한 지식인 중심의 '직업적 문화예술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국지적 노동 현장 내부에서 전개한 일상적인 '생활문화운동'이다. 전자의 경우 1985년 민중문화예술연합(곧 민중문화운동연합으로 개칭하고, 1990년에는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으로 개칭한다)의 결성으로 '재야운동'의 일부가 되었고, 후자는 각지의 노동조합이나 지역노동운동단체와 결합하여 '노동운동'의 일부가 되었다.

물론 민중문화운동 진영 내부에서의 차이는 조직 형식이나 활동 방식에 의한 구분보다 훨씬 복잡했기 때문에, 이런 구분은 다소 위험할 수도 있다. 또한 두 운동 모두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 민중의 자기의식화를 궁극적 목표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 사이에는 대학교 시절부터 형성된 인적 유대도 존재했다. 그렇지만 다소의 지향의 차이가 존재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간략히 말해서 전문적 문화예술운동은 '문화예술인'이라는 자기정체성을 가지고 민중의 세계관을 작품이나 연행을 통해 구현하려는 지향을 가졌던 반면, 후자는 일회적 공연중심의 활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중의 일상에 보다 밀착한 활동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즉, 전자의 활동 목표가 심미적 감동과 선전.선동이었다면, 후자는 일상의 활력과 '의식화'였다.

이런 차이는 '전위주의 대 민중지상주의(populism)의 대립'으로 고착되기 쉽고, 그 대립은 문화적 활동이 정치강령에 의해 종속될수록 더욱 확대된다. 이는 단지 정치적 지향이나 활동 방식의 차이에 그치지 않고 미학적 기준의 차이를 동반했다. 전위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은 지배문화에 오염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므로 민중의 현재의 의식을 반영한 문화가 아니라 혁명적 의식을 제고하는 문화를 지향하는 반면, 민중지상주의는 '모든 예술은 부르주아적이고 민중 스스로 창조한 문화가 가장 민중적이다'는 전제 하에 민중의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한 문화를 지향한다. 전자는 후자를 반(反)지성주의라고 비판하고, 후자는 전자를 엘리트주의라고 비판한다.

전위주의라든가 민중지상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그 이유는 이런 용어가 편향된 것이라는 점을 당사자들이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구도는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 단지, 그런 구도가 대립으로 가시화하기 보다는 차이로 드러났다. 출판물 가운데 두 흐름의 지향을 선명히 보여주는 텍스트는 민중문화운동연합 계열의 활동가들이 저술한 {문화운동론 2} - 특히 최승운의 글 -- 과 연성수가 지은 {공동체놀이}이다. 후자의 '생활' 문화운동은 문화운동을 "실생활 속에서 생활인에 의하여 실제적인 생활의 여러 모습을 다루어내는 문화활동"7)으로 정의하는 반면, 전자의 문화'예술'운동은 "민중이 예술적 무기를 갈고 닦는 일이며, 이러한 직능을 훌륭히 수행하기 위해 일정한 전문적 훈련을 해낸다"8)는 것을 의미한다. 9)

그렇지만 반목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이런 차이가 생산적으로 접속된 것도 아니었다. 접속이 이루어지지 못한 이유는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외래문화에 대한 견해 차이가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민중문화운동은 전반적으로 '반미주의'와 '민족주의'를 를 표방했지만, '미국 이외의 외국'에 대한 시각은 사뭇 달랐다. 목적의식적이었던 문화예술운동이 외국의 사회변혁과정에서 탄생한 저항적, 혁명적 예술형식을 '자연발생적으로' 수용했던 반면, 생활문화운동은 이에 무관심하면서 기층 민중의 전래 민속과 문화형식을 '목적의식적으로' 수용했다.

두 경향 사이의 거리는 1986년부터 '전체' 운동세력의 노선이 양분되면서 더욱 멀어졌다. 이 분열의 내용을 상론할 수는 없지만 딘순하게 말한다면 '자주성'을 강조하느냐, '당파성'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노선과 조직과 실천의 차이가 발생했음을 상기할 수 있다. 또한 나의 능력 밖이지만 지역에 따라서도 무시못할 차이가 존재했다.

 

3) 민중문화운동(3): 정치강령 그리고...

민중문화운동의 각 세력들은 1987년의 혼란스러운 정세에서 '노선에 따라' 정치운동에 참여했다. 대통령 선거에서의 패배와 그 뒤 제 6공화국 시기 가운데 '1980년대'에 해당하는 2년 동안에도 사정은 크게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1987년의 분열이 더욱 공고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지금 필요하고 또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옳으냐라는 판단보다는 문화운동 자체가 정치강령이 됨으로써 발생한 효과들일 것이다. 불행히도 나는 이 효과들에 대한 가치판단도 아직 내리기 힘들다. 그렇지만 하나의 효과는 말할 수 있다. 정치강령이 현실과 긴장에 처하면서 민중문화운동의 노선과 지향도 위기에 처한 것이다. 따라서 1992-3년 경부터 여타 민족민주운동의 구심이 되었던 조직들이 위기에 처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민중문화운동의 조직들도 위기에 처했다.

1980년대 민족민주운동의 전개과정 및 1992-3년의 위기에 대해서 여기서 상론할 수 없고 아마도 이 책에 실린 다른 글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1990년대 이후에도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등에서는 선과 강령의 차이에도 불문하고 이른바 '직능부문운동'이나 '부문계열운동'의 하나로 '문화패(혹은 문예패)'의 활동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민중문화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 일부는 현재 영화인, 음악인, 연극인이 되어 한국의 문화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90년대 종반을 치닫는 지금에도 시위, 파업, 농성 등의 집회에서 우리는 민중문화운동의 영향이 남아있는 노래와 춤과 그림을 보고 듣는다.

그런데 이런 '유산'은 특정한 장소에서 제한된 기능만을 발휘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래서인지 집회에서 보고 듣을 수 있는 민중문화운동의 유산들은 과거의 모습을 시뮬레이션한 듯한, 마치 '진기한 유물'을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달리 말하면 민중문화운동으로 영향받은 문화적 형식들은 일상의 영역에서는 거의 보고 들을 수 없다. 설사 접할 수 있다고 해도 심미적 감동을 느끼기에는 감성적으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모두) 너무 멀리 있는 듯하고, 일상의 재미를 느끼기에는 너무도 진지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형식을 빌려 이 절을 정리해야 할 듯하다.

앞서 언급했듯 민중문화운동세력의 전위들은 문화나 예술에 대해 '도구주의'적 관점을 취하지는 않았다. 즉, 문화가 단순히 경제의 '반영'이라든가 정치의 '수단'이라는 생각으로부터 거리를 두었고, 여타 정치운동세력에 대한 주장도 1980년대 중반까지는 다소 소극적인 느낌을 주었지만 뒤에는 적극적으로 변모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10) 단순한 기능적 필요에 의해 문화운동을 인정했던 '일반' 정치조직의 사고에도 변화를 볼 수 있다. 즉, 문화를 단순한 '투쟁의 표현(혹은 무기)'로 간주하는 것을 넘어서 나름의 미학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이 '나름의 미학'이다. 앞서 본 편의상의 이분법을 계속 이용한다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의 민중문화운동의 주체들은 '당파성'을 강조하는 계열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자주성'을 강조하는 계열은 '주체의 미학'에 충실하고자 했다. 문제는 이런 미학적 원리가 이미 '오래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독창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어떤 경우든 특정한 '모델'을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다. 이 '모델'이 진정한 사회주의인가, 사회주의가 과연 자본주의보다 진보된 체제인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정말 진보적인 예술형식인가라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여기서는 불필요해 보인다. '정치나 이념은 보편적이지만 문화나 예술은 특수하다'는 무리한 주장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1992년 경부터 민중문화운동이 생산한 '리얼리즘' 예술이 대중의 감성으로부터 심각하게 괴리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대중은 문자 그대로 '대중문화'의 홍수에 익사하게 되었다. 조금 묘한 것은 1980년대처럼 이런 대중문화를 '상업적', '퇴폐적', '외래적'이라고 비난하는 목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이성보다 감성이, 의식보다 욕망이, 정신보다 신체가 찬양되는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는 이 시대를 1990년대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1990년대는 1980년대 속에서 이미 배태(胚胎)되고 있었다.

 

 

4. 1980년대의 대중문화: 1980년대 속의 1990년대?

1) 대중문화: 미국문화인가 청년문화인가

대중문화를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그 성격들을 지적하기는 쉽다. 대중문화는 매스 미디어를 통해 문자 그대로 대량으로,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문화이고, 매스 미디어 산업이 광고수입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면 필연적으로 상업적 성격을 띌 수밖에 없다. 문화의 대중화는 문화의 산업화와 불가분하고, '예술'과 '상업'이 구분되지 않음에 따라 문화적 생산물은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대량생산되고 대량소비되는 일회용품 정도로 격하된다. 이렇게 지적하는 일은 매우 손쉽다.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이런 일반론 외에 한가지 성격이 추가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대중문화가 '미국적', '미국화된(americanized)', '미국으로부터 영향받은' 문화라는 점이다. 즉, 대중문화란 미국의 쇼비즈니스계의 산물로 치부되었다. 대중문화가 '외래 퇴폐문화'와 등치되어 온 것은 이 점과 무관하지 않다. 나아가 앞에서 본 것처럼 미국적 대중문화는 '돈벌이만 된다면 마약과 섹스 등 부도덕한 짓도 서슴지 않는 천박하고 퇴폐적인 문화'로 인식되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의 입장이 극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있다는 점이다. 민족정기 운운하는 전통주의는 물론이고 유럽적 고급예술을 숭상하는 고전주의자, 자본주의 예술을 반대하는 급진주의자, 심지어는 식민지 시대 일본문화에 대한 향수를 가진 매국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양립불가능한 입장이 이 점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했다. 1975년의 대마초 사건은 이들 모두의 암묵적 동의 하에서 집행된 조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식적 태도와 비공식적 행태는 다르기 마련이다. 한국 전쟁 이후 한국에 주둔한 미군 부대의 쇼무대를 통해 직수입되기 시작한 미국의 대중문화는 19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을 거치면서 한국인의 일상 깊숙이 침투했고, 이는 특히 대학생이나 '사회지도층'에게 더욱 깊이 자리잡았다. 이와 더불어 현대적인 문화산업(혹은 미디어 산업), 예를 들어 방송산업, 언론산업, 출판산업, 영화산업, 음반산업 등도 1970년대의 경제성장과 더불어 어느 정도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주목할 점은 이 과정에서 주류 대중문화 뿐만 아니라 '비주류(대안적)' 대중문화도 무의식적으로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들 대안적 문화는 '청년문화'라는 상징작용을 갖는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기성 세대에 반항하는 성난 젊은이'라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들은 단순히 대중문화의 스타일 뿐만 아니라 청년 문화의 아이콘이었고 주류 쇼비지니스와는 상이한 미국, 즉 '다른 미국(Other America)'의 이미지였다. 이런 영향은 단지 미국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전세계적 현상이었고 한국도 시차는 있었지만 이런 영향으로부터 예외가 아니었다.

게다가 1970년대 한국의 문화예술인은 그저 '미국 문화의 모방'이라고 폄하하기는 곤란한 수준의 창조적 성과물을 내놓기도 했다. 한대수, 신중현(이상 음악), 하길종, 이장호(이상 영화), 최인호, 조선작(이상 문학) 등은 미국 문화에 젖어 있으면서도 '양키 문화'를 이용하여 무언가 의미있는 작품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은 타당하다. 그렇지만 '만약 이들이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1980년대의 대중문화가 그처럼 척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아직까지도 한국의 문화예술인들에게는 강력한 '가정의 역사'로 남아 있는 것도 현실이다. 앞서 언급했듯 1975년의 '대마초 파동' 이후 1970년대 후반 대중문화계는 성인지향적인 오락문화로 복귀되었고 대부분의 문화예술인은 언더그라운드로 칩거하거나 아예 한국을 등지고 문화적 망명객이 되어야 했다. 이들 중 일부는 1980년대 초 해금의 혜택을 받았지만, 오랜 공백으로 인한 감각의 상실을 메울 수는 없었다. 물론 한수산처럼 '별 것 아닌 이유'로 1980년대 이후에도 문화적 망명객이 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했지만.

1970년대 중반 이후 정부와 대중문화인 사이의 세력 관계를 고려한다면 1980년대 초 대중문화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정책의 의도대로 잘 재편된 것은 이상하지 않다. 급속한 산업화와 경제성장으로 인해 TV, 라디오, 오디오(1980년대 후반부터는 VTR) 등의 전자 미디어의 보급률은 100%에 육박하였고, 정부는 앞서 본 언론 및 방송 통폐합을 통해 이들 매스 미디어를 완벽하게 통제하였다. 아이러닉한 것은 각종 규제와 억압이 온존되는 상황에서 대중문화는 이전과 달리 화려하고 '컬러풀'해졌다는 점이다. 컬러 TV의 조기방영과 연예인 두발 규제의 완화와 더불어 <영 일레븐>, <젊음의 행진>같은 청소년용 오락 프로그램이 성행하였다. 또한 극장 설립와 영화 검열의 완화에 따라 '에로' 영화 등 저질 음란물에 가까운 외국 영화들이 다소의 가위질만을 거친 채 허용되었고, FM 방송을 통한 영미 중심의 팝 음악의 조류들도 이전 시기에 비해 시차를 현격히 줄이면서 소개되었다.

따라서 1980년대 한국의 대중문화는 상업적 성격과 청소년 지향적(youth-oriented) 성격을 동시에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달리 말한다면 1980년대에 10대 시절을 시작한 세대, 흔히 '영상 세대'라고 불리는 세대는 '대중문화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감성을 지니게 되었다. 여기서 1980년대의 '대중문화 대(對) 민중문화'의 구도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 대립구도는 '상업적 문화 대 비상업적 문화'라는 일반적 대립 구도 가운데 '10대 문화 대 대학생 문화'라는 특수한 대립을 내포하고 있다. 이때 대학생이란 '대학에 실제로 다니는 사람'이라는 의미보다는 대학생 연령의 세대라는 뜻에 가깝다. 쉽게 말해서 대학생이 되어서도 대중문화를 즐기는 사람은 10대 사춘기 시절의 경험에 고착된 철들지 않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아야 했다.

 

2) 1980년대의 대중문화에 대한 재고

그렇다면 1980년대의 대중문화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인가. 그렇게 폄하할 수만은 없는 몇 가지 현상이 존재한다. 달리 말하면 대중문화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완벽할 수 없고 그 틈새에서는 무엇으로 개념화하기 힘든 현상이 발생했다. 그 대표적인 것은 이른바 '매니아 문화'11)의 확산이다. 대중문화를 일회적 오락의 차원에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심미적 감상의 수단으로 삼는 현상을 말한다.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극히 일부 계층에서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1980년대는 이런 현상이 일반 청소년층까지 확대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 대상으로는 영화나 대중음악 같은 오래된 대중문화의 형식 뿐만 아니라 만화,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같은 새로운 형식들도 포함되었다.

개인적이고 폐쇄적인 매니아 문화를 넘어 외래 대중문화의 형식을 이용하여 기성세대에 대한 상징적 반란을 표현하는 흐름들도 관찰된다. 주목할 것은 1970년대까지 이런 흐름들이 주로 '대학생'에 국한되었다면 1980년대에는 대학 이외의 지역까지도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서울 지역에 한정해서 본다면, 신촌과 낙원동에 형성된 '언더그라운드 록 공동체', 대학로에 형성된 '브레이크댄스 공동체' 등은 대중문화의 영역에 속하면서도 주류 대중문화와는 상이한 지향과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필자가 관찰할 수 없는 여타 지역에서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 흐름들은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형성한 문화는 주류 대중문화는 물론 '민중' 문화로부터 소외된 무리들의 하위문화였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대중문화라고 부르는 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적어도 1980년대 후반 이후 대중문화는 고급문화나 민중문화같은 '외부'를 갖지 않는 내재적 장이 되었다. 이는 대중문화를 거부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대중문화 내부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1980년대 말 운동권 출신 노래패(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래마을)와 운동권 출신 영화인 (박광수, 장선우 등)의 절반의 성공이라는 사건은 대중문화에 대한 시각의 점차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렇지만 이런 사건은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에 비하면 파장이나 영향 면에서 미약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록 공동체 출신의 '뮤지션'과 댄스 공동체 출신의 '댄서' 두 명의 결합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대중문화에도 '타자의 감성'이 존재하며, 이 감성이 매스 미디어를 통해서도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외래의' 음악과 춤을 이용하여 기성의 '한국인적' 취향을 전복한 성과는 많은 사람들을 동요시켰다.

이런 사건과 상황을 종합한다면, 1980년대의 문화적 형세는 다시 정의할 수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 대중문화는 한편으로 본격적인 '산업'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해독할 수 있는 수용자층을 형성하는 과정이었다. 문제는 '정부'도 '재야'도 이런 과정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몇 가지 논점을 제출할 수 있다.

첫째로 현대의 대중문화는 '상업적 매스 미디어에 의해 대량으로 전달되고 대량으로 소비되는 문화'라는 정의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즉, 대중매체(mass media)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수준의 미디어가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중문화라는 장(場)은 '정치에 일방적으로 종속된' 장도 '정치가 부재한' 장이 아니라 '복잡한 방식으로 정치적인 장'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둘째로는 대중문화에서 '대안'을 모색하려고 한다면 대중문화로 오염되지 않은 외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문화 내부를 경유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를 이른바 '비즈니스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즉 대중문화의 정치적 가치는 '어떤' 비즈니스를 수행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즉, 상업적 비즈니스의 형식을 취하는 실천의 '본질적 한계'를 미리 경계짓는 것이 아니라 허용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확장시킴으로써 문화정치가 수행된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12)

마지막으로 현대의 '국민적 대중문화(national popular culture)가 산업화 과정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미국화 과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대중문화에서 새로운 대안을 추구한다면 순수한 국민문화의 부활이 아니라 혼성화(hybridization)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물론 여기서 미국이란 실제의 미국이 아니라 상징적 미국이며, 따라서 좀 어폐가 있지만 미국 이외의 나라를 포함한 나라의 대중문화도 포함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국민적 대중문화란 탈미국화(de-americanization)와 재미국화(re-americanization)의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다. 1980년대는 부단히 진행되는 과정의 특정 국면을 최종적 완성 형태로 사고했던 것 아닐까.

 

 

5. 맺으며: 문화가 지배하는 시기의 어떤 몽상

그렇다면 '문화의 시대'라고 불리는 1990년대는 1980년대보다 진보한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아직 모호하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문화를 예술형식 중심으로 고찰한 이 글의 범위를 넘어 생활양식 전반에 대한 구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즉, 한국인의 표준적 생활양식과 이로부터 일탈하는 (여러) 생활양식들에 대한 조사. 현재로서 할 수 있는 말은 1990년대의 문화의 시대가 사실은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의 시도('문민정부의 개혁')에 따른 여가생활의 재조직에 따라 형성된 소비주의(consumerism)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런 변화는 1980년대 이전부터 추진되었고, 변화를 추동한 힘은 한국의 문화산업의 자생적인 성장이라기 보다는 대외적 압력의 효과였다. 1980년대 후반은 미국의 시장개방 압력이 가시화된 시기였고 태평양을 오가며 실무협상이 이루어졌다. 1980년대 초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국내의 구조조정을 대체로 완료한 미국은 새롭게 재편된 산업구조에 부응하는 세계 시장의 형성에 나섰는데, 그 중에서도 문화산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간주되었다. 시장개방과 관련된 협상들 중에서 문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야는 다름 아니라 저작권을 비롯한 지적 재산권 협상이었다. 1987년 저작권법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이제까지 외국의 저작물을 저작권 협약 없이 '무단으로' 출판했던 관행은 국제법적으로 제재받게 되었다.

이는 단지 '불법복제물의 단속'의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였다. 문화는 이제 단지 상품이 아니라 '재산' 혹은 '자본'이 되었다. 즉, 문화산업은 재화나 서비스를 판매한 대가로 수입을 획득하는 것보다는 재화나 서비스를 사용할 '권리'를 판매하고 이로부터 일정한 사용료(이른바 '로열티 royalty')를 수취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의 대외적 압력은 이미 이때부터 문화산업을 비롯한 한국의 산업구조의 전반적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문제였다. 1987년의 저작권 협약은 몇 가지 유예조항을 두는 등 제한적이었으므로 이런 변화가 보다 가시화되는 시기는 1996년의 저작권법의 개정을 전후로 하는 1990년대 중반이다. 그렇지만 1980년대 후반에도 가시적인 제도적 변화가 있었다. 상징적인 변화는 1988년부터 시작된 다국적 문화산업의 한국시장 진출이었다. 13)

한국 정부는 부랴부랴 문화산업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러면서 1990년대 이후 정책적 담론에서 문화는 '산업'과 '관광'의 문제가 되었다. '문화관광부'의 등장은 문화가 교육, 공보, 체육을 거쳐 이제 관광의 파트너가 되었다는 점을 상징하는 듯하다. '문화산업이 21세기 필쟁의 승부처', '문화산업은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수사들, 그리고 조금 희화스럽지만 '신지식인'에 대한 담론은 이제까지 애물단지였던 대중문화에 대해 급작스럽게 지원과 육성의 필요성이 나오는 것은 어리둥절하기까지 하다.

이는 한편으로는 앞서 언급했듯 대중문화가 정부의 규제를 벗어나 '산업'이라는 제자리를 찾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중음악 등 몇몇 분야에서 사전심의제도의 폐지, 등록제나 신고제의 폐지를 골자로 하는 {공연법}의 개정은 분명 전향적인 조치이고, 여기에는 대중문화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몇몇 중하위직 공무원들의 노고가 컸다(어쩌면 이것도 1980년대 민중문화운동의 간접적 영향일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문화를 전체적으로 관장하는 상급 담당자들은 여전히 대중문화의 가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해 보인다. 즉, 문화의 정치적 사용이라는 구시대의 발상이 문화의 경제적 활용이라는 '21세기적 발상'으로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 1980년대의 민중문화운동을 논하는 일이 우울한 이유 역시도 그 운동이 어떤 의미에서든 '문화의 정치적 사용'이었다는 점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나름의 객관적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도 이런 평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화는 정치로부터 초연해야 하는가. '1980년대의 인식'은 이런 주장을 '부르주아 예술관'이라고 불렀고 나는 아직도 여기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그렇지만 원칙적으로'만' 동의할 뿐이다. 문화와 정치를 분리시켜 사고하는 관습 자체를 탈피할 수는 없었을까. 앞서 지적했듯 문화 내부에서 정치가 전개되고, 이런 정치는 관습적 의미의 정치와 다르다고 사고할 수는 없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문화의 정치적 사용 자체라기 보다는 '어떤' 정치에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이고 나아가 '정치의 문화적 구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다.

이런 논점들은 1980년대에는 '토론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건 다행일까, 불행일까. "외로울 땐 동지여! 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14)라는 표현은 당시를 살아온 사람의 분열적 의식을 드러내준다. 그건 참 다행한 일임과 동시에 불행인 일이었다. 외래문화로부터 독립되고 상업적 힘에 오염되지 않은 문화를 건설할 수 있다는 꿈은 불가능하지만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불가능함은 강화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1990년대의 문화담론'은 '비(非) 80년대'일 뿐이다. 그나마 언제부터인가 주류 저널리즘의 일부에 포섭되어 갔고, 경제위기 이후에는 그나마 전반적으로 위축된 상황이다. 또한 현재 문화비평 진영 일부에서 제기되는 주장, 즉 '바람직한 대중문화를 위해 합리적 시장이 구비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현실적인정책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제출되고 있다. 이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반동적 .퇴행적 주장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1980년대적 경직성'의 발로일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한국 지식인들의 뿌리깊은 '선진국 컴플렉스'가 작용하고 있음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 논란은 있지만 '선진국'들이 대체로 신자유주의적 방향을 취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결국 몇 가지 상상으로 이 글을 마무리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민중문화에 주목했던 1980년대의 운동들이 정치적 강령에 대해 조금 유연한 태도를 보일 수는 없었을까. 대중문화의 형식들에 대해서도 나름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할 수는 없었을까. 외래 문화에 대해서도 그 맥락을 통찰하고 보다 여유롭게 수용할 수는 없었을까. 그래서 1990년대 이후에는 민중형식에 대한 탐구의 성과를 계승하고, 이를 '글로벌'한 감각과 결합시킬 수는 없었을까. 그래서 '한국의 대중문화'를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려 국민적 독창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고루 갖추게 할 수는 없었을까. 자연발생적으로 창조되는 국지적 문화형식들을 존중하고, 이를 보편적이고 전국적인 정치에 일방적으로 종속시키지 않을 수 없었을까. 그럴 수 있었다면 대중문화를 단지 안락한 오락의 수단으로 평가절하하지도, 그렇다고 '독해'와 맹신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비문화적 정치중독 현상('한국형' 정치 오타쿠?)도, 탈정치적 문화광신 현상('일본형' 문화 오타쿠?)도 어느 정도 중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상들은 '1980년대 정치권력자들이나 문화정책 담당자들이 조금 '문화적'일 수는 없었을까'라든가,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이 굳이 있을 필요가 있었을까'라는 생각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이런 망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방금 '국민적 독창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갖춘 문화'15)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어떻게 본다면 이런 바램은 '외래 퇴폐문화와 상업적 대중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문화'에 대한 '과거의' 바램과 크게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떤 문화든 그 가치는 순수 미학적 판단의 문제임과 더불어 삶에 대한 윤리적 판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문화, 특히 대중문화의 윤리는 '재미의 윤리(ethics of fun)'다. 1980년대의 문화운동이 아직 가치있다면 문화를 윤리의 문제로 사고했다는 점이고, 가치가 없다면 재미의 문제를 사고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1999.10.23.
{문학과 사회} 에 수록됨.
1999 신현준 (gilles@nownuri.net)

 

 


1)이 대목을 쓴 몇 주 뒤 당시 이 자리에 '동참'했던 지우를 만나 대화하던 중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런데 그는 "당시 {국풍 81}에 신중현은 나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혹시 나의 착각이었나?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없어지는 '기억력'으로 인해 자신있게 말하기 힘들다. 확실한 것은 이 자리가 아니었더라도 이 무렵 다른 자리에서 본 신중현의 모습이 이 글에 묘사된 이미지로 다가왔다는 나의 기억이다. 어쩌면 지금과 그때 사이에 깊은 '망각의 심연'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go back to the text 

2) 문예진흥정책은 1960년대에 이루어진 각종 법 제도의 정비(예를 들어 공연법, 음반법, 문화재보호법, 지방문화사업 조성법 등)와 문화공보부의 발족 등 행정체계의 확립에 이어 단행된 최초의 문화정책이라고 할만하다. go back to the text 

3) 대표적인 예가 앞서 언급한 {국풍 81}같은 단발성 행사의 개최, 그리고 1983년 이후 각급 시.도단위에서의 종합예술제의 연례 개최다. 또한 1983년의 이른바 '아웅산 테러' 사건 이후 지도자의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로 추진된 독립기념관의 건립은 박정희의 현충사 건립과 비견될 만한 일이자 한국 대통령들의 이상한 민족주의의 소산이었다. go back to the text 

4)물론 이런 운동은 이전 시기보다도 더욱 희화적인 결과를 낳았다. 대표적인 예는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애국가를 방영하는 것과, 음반 마지막 트랙에 '건전가요'를 삽입하는 것이었다. go back to the text 

5)정이담(1985), [문화운동시론], {문화운동론}, 공동체. 이런 특징이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다는 점은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한국의 문화는 뿌리가 없다(모방 문화), 한국의 문화는 되바라졌다(천민 문화), 한국의 문화는 편향적이다(관변 문화)". 정과리(1999), {문명의 배꼽}, 문학과 지성사, pp.57-58 go back to the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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