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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과 아카데미가 만날 때
로이 셔커 저(1998), 이정엽·장호연 역, [대중음악 사전], 한나래, 1999.11.
한동안 대학교 강의는 쉬고 있던(아니 잊고 있던) 차에 두 곳에서 강의 섭외가 들어왔다. 오랜만에 캠퍼스 구경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아서 덥썩 수락하고 말았다. 이내 '후회할거야'라는 생각이 밀려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강의 과목은 나의 '전공'인 경제학이 아니라 '부전공'인 대중음악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 글은 강의계획과 교재 등을 물어보는 교무과 직원에 대해 '그냥 교재없이 하겠다'고 말하고 난 뒤 쓰는 글이다. 한국에서 대중음악이 아카데미와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는 명백하다. 무관 혹은 무시. 영화가 4년제 정규 대학교 여러 곳에 학과로 설립되어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대중음악을 전공 학과로 설치한 전문대학이 여러 곳 있지만 이곳은 기능과 실기 위주로 교육하므로 아카데믹한 담론과는 거리가 있다. 영화와 대중음악을 비교하는 발상 자체가 무리일까. 대중음악을 전공으로 하는 학과가 생긴다면 만화학과, 게임학과도 생기지 말란 법이 없으니, 보수적 아카데미의 입장에서 대중음악은 일종의 마지노선으로 보일 지도 모르겠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사정이 많이 다르지는 않다. 대중음악을 주제로 한 아카데믹한 담론은 양적, 질적으로 증대했지만 독립된 학과로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대중음악에 관한 연구는 커뮤니케이션학, 미디어학, 사회학, 정치경제학, 음악학, 문학 등 상이한 분과에 소속된 소수의 '스페셜리스트'의 영역이다. 달리 말한다면 대중음악에 대한 연구는 '학제간' 성격이 강하다. 이는 대중음악의 속성을 감안하면 자연스럽다. 합의된 정도라면 대중음악 연구는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라는 보다 일반적인 장에 위치한다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문화연구라는 패러다임 자체가 학제적이다. 서두가 좀 길었지만 서평의 일차적 대상은 두 권의 대중음악 연구서다. 외국의 연구자가 저술한 책의 번역서이고, 제목은 각각 [대중음악과 사회](브라이언 롱허스트 저)와 [대중음악 사전](로이 셔커 저)이다. 두 권 모두 해가 바뀌기 직전에 출간되었다. 두 저서의 연구의 대상은 유사해도, 포맷은 매우 상이하다. 롱허스트의 저작은 표준적인 교과서의 형식을 취하고 있고, 셔커의 책은 사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대중음악 사전]부터 검토해 보자. 저자인 로이 셔커는 영국이나 미국처럼 대중음악의 중심부가 아니라 뉴질랜드라는 주변부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의 직업은 매씨 대학(Massey University)이라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대학교의 '교육학과 미디어연구 전임강사'이다. 1995년의 저서 Understanding Popular Music의 서문에서 자신을 소개한 문구를 인용해 보면 "실패한 뮤지션, 전(前) 대학교 라디오 DJ, 콘서트 및 클럽 출입자(goer), 장기간의 레코드 수집가, 음악잡지의 부정기 기고가"이다. 대략 어떤 인물인지 짐작이 가는 이력이다. [대중음악 사전]은 1995년의 저서의 포맷을 달리한 버전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재탕'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대중음악 분야에 적용되는 용어와 개념을 '정의'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듯하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런 정의들이 "일반적 텍스트 속에 깊숙이 파묻혀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을 아쉬워하는 듯하다. 두 번째는 저자가 새로이 주목하는 주제를 포괄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저작권과 지적 재산권 등 음악에 대한 '권리'가 강조되는 음악산업의 경향1), 둘째 문화의 지구화(globalization)가 진전됨에 따라 문화변형(transculturation), 잡종화(hybridization) 등의 현상이 두드러지는 점2), 셋째 디지틀 테크놀로지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한 음악의 창작과 수용의 변모 등이다. 저작권 항목이 길고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점, CD 롬, 테크놀로지, 인터넷, 월드 와이드 웹 등이 중요한 항목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 지구화, 지역성, 민족성(ethnicity), 지리 등의 항목에 서술된 내용이 '논쟁적'인 점 등이 각각 위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는 특징일 것이다. 특히 지구화/지역성에 관한 항목은 저자가 '반(半)주변부'에 살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중심부의 연구자들의 연구보다 보다 생생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아무래도 셔커의 책은 사전이라는 포맷 상 '좋은 참고서'는 될 수 있어도 교재는 되지 못할 듯하다. 대중음악 연구에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일반적인 방법론을 제공하기에는 다소 적절치 않다. 물론 [대중음악 사전]을 출간한 출판사에서 몇 년 전에 출판한 바 있는 대중음악 연구의 '고전'인 [사운드의 힘(사이먼 프리스 저, 원제: Sound effects)]이 있다. 그렇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고 또 이 책은 '어렵다'는 평이 중론이다. 또한 이 책을 '업데이트'한 듯한 셔커의 1995년 저작이 번역될 전망도 별로 없다. 그래서 롱허스트의 저서가 소리소문없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에 대중음악 연구자를 자처해 온 나로서는 특별한 반가움을 가졌다. 내용을 세세하게 검토하기 전에 목차를 보면 이런 기대가 충족될 듯하다. 저자가 소속된 샐포드 대학교가 팝 음악의 전통이 강한 맨체스터에 소재한다는 점도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책의 용도는 저자가 서문에 밝히듯 이 책은 "대학생들", 특히 "문화사회학, 문화연구, 정보전달연구와 미디어 연구를 전공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1장 "쟁점과 틀"은 대중음악 연구의 방법론을 정립하기 위해 현대사회에 대한 아도르노와 베버의 논의(전자는 '표준화', 후자는 '합리화')를 소개·평주하고, 이와 정반대의 입장으로 청중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피스크(J.Fiske)의 입장을 논한 뒤 대중음악의 연구방법으로 '생산 - 텍스트 - 청중'이라는 분석 틀을 제시한다. 여기서 제시된 세 가지 분야는 각각 하나의 부(part)로 편성된다. 예를 들어 음악산업과 음반제작은 1부인 '생산'에서, 대중음악의 역사와 장르들은 2부에서, 하위문화, 팬 등은 3부에서 각각 다루고 있다. 문화연구에서 '정통'은 없지만 스튜어트 홀 이래 영국의 문화연구에서 '텍스트 - 컨텍스트 - 전유(appropriation)'라는 분석 틀은 어느 정도 '합의'를 보고 있다. 롱허스트 역시 이런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연구대상에 맞게 가공을 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책을 읽어나가면서 '컨텐츠'가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차적인 이유는 번역어의 생경함이다. 'world beat'를 '세계 일인자'로, 'transculturation'을 '초문화'로, 'mediascape'3)를 '매체경'으로 'Mark Knopfler'를 '마크 크노플러'라고 번역(혹은 표기)한 것은 저자가 과감한 것인지 내가 과민한 것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나아가 음악관련 서적에서 'harmony'를 '조화'로 번역한 것이나 'syncopation'을 '절분음','authenticity'를 '확실성'으로 번역한 것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역자가 별도로 붙인 발문이나 후기같은 것이 없으니 이유도 알 수 없다. 번역의 문제가 책에 대한 평가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저자가 쓴 책의 컨텐츠에 대해서도 다소 불충분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모든 주제를 망라하고 있으면서 제대로 다룬 건 없다'는 평은 개설서의 저자에게는 부당한 평일 것이다. 실제로 몇 가지 논쟁적 주제에 대해 저자는 독창적 견해를 제시한 것은 아니지만 구도를 잘 정리해내고 있다. 또한 도표들과 도식들이 적절히 삽입된 점도 대중음악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도와준다. [테마]라는 형식으로 저자가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와 연관된 글을 삽입한 것도 자료로서는 좋은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미진한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지금 그 이유에 대해 생각 중이다. 글로벌 컨텍스트에 대한 고려가 미흡하다고 지적할까. 그런 지적은 저자가 중심부의 연구자라는 선입견 때문이 작용한 것 같다. 또 어차피 영국의 대학생들을 주요 대상으로 한 것이니까 이건 취소. '저자가 음악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일까'라는 의심도 든다. 이건 확인할 바 없으니 역시 취소, '더 좋은 책이 있을 것 같은데 왜 굳이 이 책을 번역했을까'라는 생각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그나저나 한국에서 대중음악 연구가 '교양과정'이나 '협동과정'이라도 아카데미에 진입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음악의 '문화적 가치'가 인정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고, 그런 평가에 합당한 대중음악이 창작되어야 할텐데... 어디선가 이런 말이 들려온다. "그런 거 할 생각 있으면 박사학위 논문이나 진작 써두지".
2000.1.21.
1)대중음악 연구자들의 저작권 연구는 이미 '국제 공조'를 이루고 있다. S.Frith ed.(1993), Music And Copyright, Edinburgh University Press. 사례연구의 대상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일본, 가나(Ghana) 등이다. go back to the text 2)현대 대중음악의 전지구적 형세와 '로컬' 뮤직 씬의 사례연구에 대한 최근의 분석으로는 다음 책이 가장 탁월해 보인다. T. Mitchell(1996), Popular Music And Local Identity: Rock, Pop And Rap in Europe And Oceania, Leicester University Press.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화연구자 미첼은 이 책에서 이탈리아, 체코,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의 로컬 음악 씬의 특징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이들 지역에서의 대중음악이 '중심부 팝 음악의 지역적 변종'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넘어서고 있다. go back to the text 3) 아준 애퍼두라이(Arjun Appadurai)는 전지구적 문화에서 소통의 흐름이 작동하는 영역을 5가지로 구분한 바 있다. 이를 위해 그는 scape라는 접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ethnoscape, mediascape, technoscape, finascape, ideoscape가 그것이다. '-scape'는 경치나 풍경이라는 의미에서 경(景)이라는 역어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원어의 뜻과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애퍼두라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 A.Appadurai(1990), 'Disjuncture and DIfference in the Global Cultural Economy', Public Culture, vol.2, no.1. go back to the text |